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유스 대표단(1기) x 유스 활동가의 웰빙 워크북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휩쓸리지 않는 법』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세계 사회정의의 날(World Day of Social Justice)’을 기념하여 유스 활동가의 웰빙을 위한 워크북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휩쓸리지 않는 법』을 출간했습니다. 본 워크북은 국제앰네스티 유스 활동가를 비롯하여 인권을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웰빙well-being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한국지부의 유스 대표단이 직접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워크북 출간 이후, 유스 대표단은 워크북을 함께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나누는 강독모임을 진행했습니다. 매주 진행된 강독모임을 통해, 유스이자 인권 활동가로서 경험한 차별과 억압을 공유하는 한편, 웰빙과 액티비즘이 공존하는 문화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본 워크북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강독모임에서 나눈 이야기와 고민들을 공유합니다. 지금 바로 강독모임의 후기를 만나보세요!
1부 웰빙의 뿌리
B. 억압과 특권
B-1 국제앰네스티 내부에서 일어나는 억압
처음 국제앰네스티 워크숍에 참가하던 날, 시오나는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안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떠 있었습니다.
워크숍에서 자신이 유일한 흑인 구성원이란 걸 알았을 때, 놀랍진 않았지만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흑인 여성으로서 갖는 특정한 계급적 지위가 있었기에, 시오나는 대부분의 국제 학술 공간과
업무 공간에서 유일한 흑인 구성원이 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간에 들어서기 전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준비하곤 했죠.
심지어 발언을 하는 게 얼마나 안전한가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대본’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날은 평소보다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소속 인권 활동가가 주최하는,
인권 활동가를 위한 워크숍에서조차 미세공격에 대응해야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이 사람의 인상은 어떤가요?
한밤에서 이 사람과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엄청 진지해 보여.
행복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아.
음악가 아닐까?
옷 가게를 운영할 수도 있지.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할 것 같아.
자동차 정비사라든가.
아니, 직업은 없어 보이는데.
무섭게 생겼어!
참가자들이 편견에 차서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오나는 경계를 푼 게 잘못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왜 백인 남자는 음악을 좋아하고,
흑인 남자는 몸 쓰는 일을 하거나 무직인 데다 폭력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지금 아무도 이상한 거 못 느껴?
미안하지만 밤중에 이 사람이랑 마주치면 난 반대편 길로 갈 거야. 무서워.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게이라서 길에서 시비걸거나 위협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 남자는 날 해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뭔가 말하는 게 좋을까?
(또) 잘못되는 건 아닐까?
지친다… 왜 나만 앰네스티에서 ‘불의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너무 의미 부여하는 건가?
워크숍도 처음인데…
워크숍 참가자들은 인종차별을 부정하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인종차별적인 시스템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너희는 다들 춤도 잘 추잖아!”) 반응을 보였어요.
시오나가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시오나와 사피야가 제기한 문제를 인정하는 대신,
상황을 직시하길 회피하며 문제를 왜곡했습니다(
“나도 인종차별 당해봤어”).
안타깝게도 시오나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시오나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세요.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고, 말을 할 때마다 단어 하나하나와 몸짓, 말투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해봤자 들어주거나 인정하는 사람도 없죠.
워크숍 참가자들은 인종차별을 부정하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인종차별적인 시스템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너희는 다들 춤도 잘 추잖아!”) 반응을 보였어요.
시오나가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시오나와 사피야가 제기한 문제를 인정하는 대신,
상황을 직시하길 회피하며 문제를 왜곡했습니다
(“나도 인종차별 당해봤어”).안타깝게도 시오나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시오나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세요.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고, 말을 할 때마다 단어 하나하나와 몸짓, 말투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해봤자 들어주거나 인정하는 사람도 없죠.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휩쓸리지 않는 법』, 19-27p.
✏️ 시오나가 경험한 것처럼, 인권 활동을 하며 억압을 받은 경험이 있나요?
억압
은미
저는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27페이지에서 시오나가 참석한 워크숍 참가자들이 인종차별을 부정하잖아요. 이 파트가 공감이 많이 됩니다. 저희가 유스로서 앰네스티에 문제제기를 한다면, 연령차별이나 나이를 기반으로 한 토큰주의를 문제제기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만약 시오나처럼 권리보유자가 아닌 사람이 “앰네스티에는 토큰주의가 없다”라는 발언을 한다면 화가 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할 것 같아요.
절차적으로는 다 열려 있으니까 토큰주의가 없다는 식으로 차별을 부정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권력이자 토큰주의겠죠. 정말로 토큰주의를 없애려는 문화를 자리 잡도록 최선을 다했다면, 유스들이 이런 말을 했을 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게 형식적, 절차적 보장을 넘어서서 문화로 자리잡는 방향성 중 하나고요. 그런데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부정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공감이 돼요. 이런 경험이 있기도 하고요. 시스템상으로 문제가 없고, 이대로 둬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한다면 저는 시오나가 겪었을 정신적인 힘듦이 너무 공감이 될 것 같아요. 시오나처럼 정신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는 생각이라고 해야 될까요? 자기검열을 좀 많이 하게 돼요. 이런 상황에 계속 놓여 있으면 아무도 문제라고 하지 않는데 나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나만 지금 신경을 많이 쓰고, 나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가?”, “내가 잘못된 건가?” 이렇게 계속 검열을 하게 되거든요. 저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고요. 시오나처럼 불편한데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고, 그렇게 되니까 내가 더 준비해서 말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악순환이라고 해야 될까요? 이 악순환이 너무 공감이 됐어요.
겉으로 보면 이해하는 듯이 얘기하지만
사실상 바뀐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많았어요.
서연
제 경험에서는, 차별에 대해 얘기했을 때 “이렇게까지 사납게 굴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제가 예민하다는 듯이 얘기하고, “너 정말 신기하구나” 이런 식으로 돌려서 얘기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던 것 같아요. 저희 학교에서도 인종차별이 담긴 말들이 심해져서 학교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말을 좀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잠재적으로는 차별이 아닐까요?”라고 말했을 때도 “물론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거는 그렇게까지 공론화를 하지 않아도 될 문제가 아닐까?”라는 식으로, 겉으로 보면 이해하는 듯이 얘기하지만 사실상 바뀐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많았어요. 그래서 시오나의 상황이 많이 공감이 됐어요.
다예
그런데 그 상황 안에도 권력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거잖아요. 선생님은 어떤 상황을 통솔하고 결정할 수 있는 학급의 분위기도 만들 수 있고, 이런 문제를 공론화를 시켜서 “이런 발언은 절대 하면 안 된다”라고 공식적인 발언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서연님은 구성원으로서 문제를 제기한 건데, 비청소년이면서 발화권력을 가진 사람이 한 구성원으로서 낸 의견을 단순히 나보다 어린 사람의 얘기로 치부해버리고, 예민하다는 듯이 평가해버리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만 않으면
이미 평평한 페이지에 다 같이 서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나연
24페이지에서, 사피야라는 친구는 취약집단에 속한 게 아닌데 발언을 해준 거잖아요. 정말 화나지만, 여러 상황에서 취약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한 발언이 훨씬 더 쉽고 가볍게 잘 받아들여진다고 느꼈어요. 학교에서 공부했을 때, 사회 시간이나 아니면 보건 시간 같을 때에 성차별에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여자 아이들이 하는 말보다 남자 아이들이 한마디를 해주는 게 훨씬 더 큰 힘을 갖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오히려 취약집단 구성원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취약집단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발언을 해야 한다는 게 화나지만 어쩔 수 없는 디테일이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자기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실제로 여성으로서 발언을 하게 되면, 오히려 “내가 지적을 했다가 그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여자는 예민하다” 아니면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편견을 강화해 버리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5페이지에서도 인상 깊었던 게,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의 기본값은 인종차별주의적이에요”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이런 건 연령차별에도 충분히 적용이 되는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차별을 하지 않으면 기본값은 그냥 ‘없는 상태’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중요한 건 기본값이 이미 망가져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거를 되돌리려고 노력을 하는 건데,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만 않으면 이미 평평한 페이지에 다 같이 서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시작부터 망가져 있다는 걸 인지만 해도 좀 더 의식적인 발언을 할 텐데 말이에요.
교차성
나연
그리고 금발 친구가 “금발에 파란 눈이라 인종차별당한 적이 있거든”이라는 말을 했을 때 교차성의 개념이 생각났어요. 사실 이 친구는 백인이자 여성이라는 교차성을 지니고 있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한 가지 측면에서 취약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자기가 하는 모든 발언이 차별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자신이 특정 취약집단에 속해 있어도 충분히 다른 취약집단에 대해서 차별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건데 말이에요. 이런 걸 조금 더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예
시오나는 여러 층위의 차별을 복합적으로 겪고 있는 건데, 백인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이 사람은 시오나가 겪는 차별을 “너도 차별 당했어? 나도 차별 당한 적 있어” 이렇게 납작하게 보는 거니까요. 교차성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상황인 것 같아요.
은미
나연님 말에 공감했던 게, SNS 속에서 되게 많은 말들이 나와요. 성차별은 우리나라에서 되게 공고하다는 건데, 그건 맞아요. 하지만 자신이 성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난민, 이주민, 장애, 민족적으로는 다른 취약집단 구성원에게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을 내리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앨라이
취약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은미
그래서 저는 앨라이(Ally)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던 게, 차별을 받는 당사자들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너무 안 받아들여지고, 말을 하는데도 에너지가 많이 들고 지치기 쉽잖아요. 근데 24페이지에 시오나를 대신해서 말해준 사피야도 인종차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문제 의식이 있으니까 목소리를 내준 거겠죠? 저도 저 스스로는 이주민이 아니고 난민이 아니지만, 그런 문제에 대한 혐오발언이 나올 때 반대 의견을 공유하면서 “이런 차별도 있다”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런 식으로라도 취약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그래야 자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거잖아요.
다예
24페이지의 사례처럼, 자신은 이게 헷갈리잖아요. 내가 개인적으로 서운한 건지, 인권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만큼의 문제인 건지 자기검열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헷갈릴 때 앨라이가 딱 명확하게 말해주면 내가 지금 개인적으로 예민한 게 아니고, 문제제기해도 될 만큼의 혐오 상황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으니까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 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더 발화권력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말을 했을 때 판을 바꿀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말하는 사람도 자기가 취약집단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하는 말을 검열하긴 해야겠죠.
다예
맞아요. 당사자의 이야기가 메인으로 갈 수 있도록요.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엄청 미세한 차별들도 있을 수 있고요.
저는 옛날 얘기긴 하지만, “장애를 극복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건 정말 비장애인의 시선이거든요. 당사자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쉽게 말하면 안 된다고 느껴요. 그것 또한 또 다른 차별이고, 공격이겠죠. 당사자가 “나는 극복할 수도 없고, 극복을 바라는 게 아닌데 왜 극복만이 나를 구원하는 것처럼 말하지? 극복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요. 비당사자로서 말할 때는 당사자보다 더 많이 사고하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유스의 노동
나연
어린 직원으로서 일하면서, “네가 사회초년생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런 식으로 조언을 가장하는 무시성 발언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제가 특정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의견을 표하면, ‘MZ세대’여서 당돌하게 말하는 거라고 치부하시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직장이 처음이니까 그런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다예
책에 나온 사례는 그래도 앰네스티 직원들의 워크숍이니까, 직원이라는 계급 안에서는 동등하겠죠. 그런데 유스들은 아르바이트 상황에도 많이 놓여 있잖아요. 그럼 아르바이트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사용자는 또 비청소년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반인권적 상황들도 꽤 많을 것 같아요.
“요즘 20대들은, ‘MZ’들은 왜 그러냐”
라고 얘기를 하셨었어요.
은미
제가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의 일이었는데, 코로나 후유증 때문에 일을 신경을 잘 못 썼던 때가 있었어요. 근데 그렇게까지 신경을 못 쓰진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실수를 하나 했는데, 사용자분, 그러니까 원장님께서 “요즘 20대들은, ‘MZ’들은 왜 그러냐”라고 얘기를 하셨었어요.
은미
그러니까요. 그리고 저는 너무 억울했던 게, 원장님께서 지적하신 잘못은 제가 한 게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20대’라는 단일한 집단으로 묶으면서 나이를 기반으로 한 혐오를 하셨어요. 제가 실수를 하면, “이렇게 일을 못하면 내가 너를 신고할 수 있어”라며 겁을 주기도 하시고요. 당시에는 ‘어차피 한 달 후면 계약이 종료되는데, 그냥 참고 넘어가자’ 싶었지만, ‘사용자로서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다예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잖아요. 이 사람은 날 자를 수도 있고, 월급에 불이익을 줄 수도 있고요. “네가 이 시간에 이렇게 실수해서 이만큼의 손해가 났으니까 너한테 월급을 이만큼 빼고 주겠다” 이럴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본인은 “내가 이 사람한테 밉보이면 월급을 덜 받거나 잘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정성을 안게 되고요. 권력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를 제기하기에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죠.
아르바이트생이 가지는 힘은
정말 없거든요.
나연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제 친구는 사장님이랑 같이 일하는 타이밍이 생긴 적이 있대요. 그때 조금씩 일이 밀리기 시작했는데, 사장님 때문에 밀린 거였거든요. 그러니까 사용자의 잘못이었는데, 일이 끝나고 직원들을 다 모아서 퇴근 시간이 지나고도 거의 30분 동안 연설을 막 하셨대요. 모든 걸 제 친구의 탓으로 돌리면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면서요.
이 친구도 유스이면서 비정규직인 거잖아요. 비슷한 걸 겪은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요. 일단 아르바이트생 탓부터 하는 거죠. 같은 위치에 있는 직원 탓을 하면, 그 직원은 불만을 토로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지만 아르바이트생이 가지는 힘은 정말 없거든요.
다예
비정규직이면서 유스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사용자가 자신의 편견 아래에서 가장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되는 정체성에게 문제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네가 잘못한 거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커다란 차별이고 나이를 기반한 여러 가지 권력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아요.
획일성,
비가시화
다예
저는 은미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이 차별을 받고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차별을 안 한다고 여기거나,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다고 정당화하는 경우도 한국 안에서 정말 심한 것 같다고 느꼈어요. 또, 우리나라에는 보편성, 획일성, 정상성에 많이 집착하고,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정체성에 대해 일단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요. 그냥 나랑 다르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말이에요. 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 계속 눈도장을 찍고 공존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사회가 바뀔 것 같은데, 보여주기 위해서 나오는 것 자체를 막고 있으니까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겠죠.
누구나 최소한 어딘가를 부정적인 시선을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이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그런 게 잘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은미
내 눈에 보이는 것 자체를 되게 거슬려하는 것 같아요. 그런 시선 자체가 공적 공간에 사람들이 나올 수 없게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더 비가시화되는 거죠.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잡고 다니든 누구나 당연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사회여야 하고, 누구나 최소한 어딘가를 다닐 수 있고, 부정적인 시선을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이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그런 게 잘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나연
다예님 말씀에 약간 더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일상에 침범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나에게 이 익숙해진 루틴과 일상에 침범하는 순간, 거부감이 드는 것 같아요. 실제로 저도 어렸을 때 서울에 살았을 때도 장애인 분들이나 심지어 노인 분들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것도 별로 못 봤던 것 같거든요. 그 정도로 비가시화가 심각하게 돼 있다 보니까, 그런 분들이 보이면 자기 일상이 침범받는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 같아요. 내 일상에 난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요.
다예
그렇게 분리된 상황도 진짜 많은 것 같아요. 인권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도는 높고, 수업이나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는 인권친화적인 말을 되게 잘하지만, 막상 사적인 영역에서는 체화나 내재화는 전혀 안 돼 있는 거죠.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연령차별도 그렇고, 여성혐오도 그렇고, 성소수자 혐오도 그렇고, 기본값이 차별인데,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내 기본값은 지금 너무 평화로운데 왜 네가 내 기본값을 깨려 들어?”와 같이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기본값을 바꾸는 걸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드는 걸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유스와
공적 공간
다예
다시 유스 이야기로 돌아오면, 잘 안 보이던 존재가 공적 공간에 나타나는 것을 불편해하고 안 익숙해하는 비유스가 많은 것 같아요. 회의 자리나 의사결정 자리에 유스가 들어오는 것과 같은 거요. 상징적으로 전시하기 위해서 유스들을 공적 공간에 부르긴 하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은 어른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너무 당연하고, 실제로 그 사람의 의견을 들을 마음은 별로 없는 거죠. 결정은 비유스인 자신이 할 거니까요.
유스들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되고, 언제 어떻게 자신의 발화에 힘을 실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나 교육을 받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적죠. 그럼 더 알려주고 교육해주고, 동등한 선에서 얘기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까지 주는 것까지가 평등인데, 그냥 “우리는 너한테 한 자리를 줬잖아”, “너도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게 해줬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평등해” 이렇게 사고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실 그건 평등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평등하게 발화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인프라를 제공해주는 것까지가 평등인데, “네가 알아서 해야지”, “네가 겁먹지 말고 말하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모든 걸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건 평등은 아닌 것 같아요.
인프라를 먼저 제공해주는 게 맞는데,
우리가 먼저 계속 힘을 내서 얘기를 해야 된다는 점에서
항상 에너지가 많이 소모돼요.
은미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이는 거대한 의사결정기구에서는, 매우 많은 참가자가 있으니 그런 것들이 더 고려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덜 고려될 가능성도 높은 것 같아요. 의사결정기구는 아니지만, 이전에 지역포럼에 참여했을 때 저를 포함해 유스 권리 보유자들이 이런 큰 자리에 익숙하지 않으니, 추가적인 교육을 받거나 정보를 공유받을 창구에 대해서 이미 질문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치 먼저 질문하거나 얘기하지 않은 것처럼 계속 먼저 물어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이후 권리 보유자들과 유스 담당자와 함께 이에 대해 얘기할 때 사실상 그들이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다들 얘기했었어요. 인프라를 먼저 제공해주는 게 맞는데, 우리가 먼저 계속 힘을 내서 얘기를 해야 된다는 점에서 항상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것 같아요.
다예
취약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왜 항상 더 애써서 문제를 바꾸려고 해야 할까요? 계속 자신이 부딪혀야 되는데, 바뀔지 안 바뀔지 모르는 것도 힘든 부분인 것 같아요.
성인 언저리에 있는 친구들도
‘완성형이 아닌 존재’라는 인식이 붙는 것 같아요.
나연
유스들이 회의실 같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인식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아동이 성인의 소유물로 인식된 기간이 너무 길었다는 것 같아요.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저는 한국에서 여전히 자녀들이 부모의 소유물 혹은 최소한 부모의 컨트롤 안에 있는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 게 크다고 느껴요. 친구들 중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게 확실하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다 포기하고 부모님 뜻 따라서 가는 것도 너무 많이 봤고요. 아동은 성인이 만져서 빚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게 너무 크다보니까, 그런 인식이 이어져서 성인 언저리에 있는 친구들도 ‘완성형이 아닌 존재’라는 인식이 붙는 것 같아요.
은미
12월에 계엄령이 터지고 나서 청소년들이나 유스들이 시위에 많이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때 반응이, 청소년이나 유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이 광장으로 나오게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라고 하는 발언들이 많았어요. 근데 저는 그게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만약 정말 그들이 청소년 인권이나 연령차별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있고, 관심이 있다면 청소년들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권리, 발언의 자유에 대해서 존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시위하는 청소년은 멋있지 않고, 기특하지 않고, 당신과 같은 동료일 뿐입니다”라는 말이 적힌 피켓도 많이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그게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유스 활동가의 웰빙 워크북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휩쓸리지 않는 법』
본 워크북은 인권을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과 액티비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도구, 연습활동을 제공합니다. 이 워크북이 스스로를 더 잘 돌볼 수 있게 하는 한편, 서로를 챙겨야 할 필요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권을 위해 싸우는 여러분의 여정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