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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행간 읽기: 영화<목소리들> 상영회 후기

쭈야 (연극연출가)

“말 걸지 말아.”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버리는 할머니. 카메라는 제주의 숲으로 렌즈를 옮긴다. 싱그러운 나무와 돌, 잎들을 여행객의 시선으로 산책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찬 웅성거림이 귀를 채운다. 어디서 흘러왔을까, 누구의 목소리일까. 렌즈가 숲을 벗어나니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4.3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의 여성이다.

말하기는 인간의 멈추지 않는 본능이다.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수단이고 목적이며, 경험과 기억이 강렬할수록 밖으로 꺼내어 말하고자 하는 욕망도 커진다. 이 다섯 명의 여성에게 4.3은 전 생애를 지배할 만큼 강렬한 기억이지만, 그 일을 평생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사는 것,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 것, 밭일과 물질 속에 묻고 덮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은 왜 침묵을 선택했을까. 아니, 침묵은 그들에게 선택이었을까?

1948년 보통의 밤, 소녀 홍순공은 집 방안에서 이불을 덮고 있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총검을 휘둘렀다. 소녀는 허겁지겁 이불을 끌어 올려 덮고 웅크렸지만, 이불을 뚫고 들어온 총검은 소녀의 몸 일곱 군데를 찔러댔다. 너무 아팠지만 소녀는 바락바락 미동 없이 죽은 듯 침묵했다. 기척이 없자 죽었다고 생각한 군인들은 방을 나갔고, 소녀는 마지막 희미한 군홧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이불을 걷지 않았다. 살아남은 소녀는 깨달았다. ‘침묵해야 산다’는 것을. 가족 잃고 열아홉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맡길 데가 없어 돛 기둥에 묶어놓고 바다에 뛰어들어 물질하며 살았다. 세 번이나 죽으려다 자식 때문에 버텼단다. 학교도 못 다녀 이제야 한글을 배우고 있다. 생을 물으니 답하는 말이, “좋은 거? 못하고 살았어.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살았어.”라고 하신다.

열네 살 김은순은 두 살 터울 언니 김은향과 이유도 모른 채 파출소로 끌려갔다. 들어갈 때는 언니와 함께였는데 나올 때는 혼자였다. 언니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왜 데려가는지 묻지 못했다. 가라는 말에 파출소를 나와 덜덜 떨며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언니와 영원히 이별했다. 여전히 언니를 왜 데려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4.3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은순의 아들은 누가 어머니를 찾아와 4.3을 물으면 “누가 와도 입을 안 연다. 입을 닫아버린다.”고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끌려가 유린당하고 학살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4.3의 어느 공식적인 기록에도 없다.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자, 수용자’만 존재할 뿐, ‘성폭력, 조혼, 전쟁 트라우마, 연좌제’로 인한 피해는 포함되지 않았다. 4.3 희생자 위령 비석에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000의 딸, 000의 처로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들에도 000의 처, 000의 딸로 새겨진 이름이 많다. 몇 년 전 일본 남서쪽 섬 이시가키의 전쟁 유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도 이름 없는 비석이 보여 물어보니 위안부로 끌려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 여성의 비석이라고 했다. 전쟁의 시대, 여성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병명 없이 평생 아팠던 김은순 할머니,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다가 갑자기 몸을 떨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무 무서워. 남자들 너무 무서워. 약을 안 먹으면 살지 못해.” 그러고는 제 가슴을 막 친다. 그러다가 하는 말이, “너무 미안합니다. 어찌어찌 견디는 정신이라, 아이고 미안합니다.” 하신다. 왜 할머니가 미안해야 할까? 할머니는 자신을 평생 고통스럽고 아픈 삶으로 몰아넣은 군인과 이 사회에 ‘사과받아야 할 사람’ 아닐까.

군인들은 토산리 주민들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이라고 명령했다. 모두 모인 언덕의 큰 나무에 8개월 아이를 밴 동네 여성의 몸이 고꾸라져 매달려 있었다. 엄마도 빨갱이, 뱃속 아이도 빨갱이가 되어 총검에 찔려 죽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얼굴 돌리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라고 명령했다. 아이는 무슨 원죄로 세상의 빛도 못 보고 죽는가. 왜 우리는 저 이웃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가. 하지만 누구도 질문하지 못했다. 침묵했다. 살기 위해.

살아남은 이들도 빨갱이라는 낙인, 연좌제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제주 남자들은 빨갱이 딱지를 떼려고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빨갱이 딱지를 벗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다. 한 아버지는 오빠를 살리자며 딸을 서북청년단 출신 남자와 결혼시켰다. 남자들이 끌려가고 죽고 떠난 무남촌의 섬 제주의 여성들은 울 여유도 없이 일했다. 학교에 다니기는커녕 스무살도 되기 전에 결혼해서 죽어라 밭일과 물질로 가족과 자식을 키우며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마을의 여남은 남자 중 하나와 결혼하여 자식 낳고 정성과 희생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명은 4.3 이후 살아남은 제주 여성의 의무이고 책임이 되었다.

할머니 한 분은 제주 어디서든 보이는 한라산에 단 한 번을 못 올라가고 사셨단다. 매일 눈 뜨면 보았을 그 산에 갈 겨를도 없이 밭질 물질하며 살아야 했을 고된 삶에 마음이 시큰하다가 문득, 어쩌면 마음이 아파서 못 가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중산간 마을에 산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생을 잃은 그 발이 차마 산을 향하지 못하고 해안가에 꽁꽁 묶여있는 건 아닐까.

영화 <목소리들> 지혜원 감독이 GV에서 발언하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에서 지혜원 감독은 인터뷰할 여성들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장벽이 가장 컸다고 한다. 한 아들은 어머니가 4.3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와 발작을 일으킨다며 거절했고, 한 생존자 여성은 혹여나 자기가 나오면 대기업 다니는 아들에게 해가 될까 걱정된다며 거절했다고도 한다. 남편이 서북청년단이어서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 감독은 처음엔 응해주지 않는 마음에 답답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들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환상통’(幻想痛), 신체 일부가 절단되거나 손실된 후에도 그 부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통증이다. 집과 이웃과 가족을 ‘이유 없이 절단당한’ 여성들에게는 아픔을 호소할 곳도, 치료받을 곳도 없었다. 숨 쉴 때마다 밀려오는 환상통을 침묵으로 꾹꾹 누르며 버티다가도, 누가 4.3을 물을라치면 단절되기 전의 그 마을, 이웃,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와 공포가 한순간에 밀려왔을 것이다. 그 날, 2024년 12월 3일 계엄의 밤은 영화가 개봉되기 이틀 전이었다. 계엄이 발표되고 얼마 후 감독은 고정자 할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잠 없는 할머니는 우연히 TV를 켰고 마침 계엄령 발표 방송이 나왔다. 할머니는 그날 밤 내내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벌벌 떨며 새벽까지 다 봤다 그거 언제 끝나냐 물으셨다고 한다.

그렇다. 할머니들은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1948년 제주에서 선포된 계엄령이 떠올랐을 것이고, 무참히 절단된 기억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온몸을 덮쳐왔을 것이다. 4.3 이후에도 서울과 광주와 부산과 전국 곳곳에서 ‘계엄령’의 이름으로 자신처럼 평범하고 무지한 보통의 사람들이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학살당한 역사가 생각났을 것이다. 나도 계엄령 선포부터 해제까지 6시간 동안 별별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계엄령 시절엔 친구끼리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가고 죽었어’라던 기억이 떠올랐고, “우리 내일 잡혀가는 거 아냐?”라며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마음은 두려움이 팔할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한 개인으로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상, 내 눈과 입과 귀를 검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물이 가득한 유리 상자에 갖힌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살면서 계엄령을 겪지 않았던 나조차 이런데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문득 나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1923년생인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하며 만났다. 할아버지는 징집을 피하려고, 할머니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양쪽 집에서 서둘러 결혼시켰다. 할머니의 사촌 하나는 쌀을 준다는 말에 어느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가 보도연맹으로 몰려 동네에서 공개 처형당하셨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할머니는 평생을 여섯 자식 키우고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내 할머니의 삶이 다섯 할머니의 생과 닮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 군사주의로 얼룩진 사회의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온 나의 분노와 답답함이 내 할머니의 생, 그리고 다섯 할머니의 생과 연결됨을 느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음에도 다섯 할머니는 여전히 말하기가 어렵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침묵과 배제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말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내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4.3의 피해생존자 여성들이 침묵으로 말하는 이야기의 행간을 읽는 것. 하고 싶었던 말을 찾아내는 것. 기록하는 것. 세상에 알리는 것. 그래서 가해와 피해, 방관과 침묵의 목소리로 뒤엉켜 서로를 학살하는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4.3이 나에게 남긴 숙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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